<p>지난 8월 27일, 빅토리아주 질롱(Geelong)에 새로운 중고품 할인 매장이 문을 열었다. 개장 당일 100미터에 달하는 줄이 매장 앞에 늘어섰고, 몇 시간씩 차를 몰아 달려온 손님들도 있었다. 줄 맨 앞에는 만삭의 임산부도 서 있었다. "뱃속에 아기가 둘이라 옷이 많이 필요해요"라며 웃음 짓는 그녀의 모습은 이 매장에 대한 지역 사회의 뜨거운 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줬다.</p> <p>이 매장은 미국계 중고품 체인 세이버스(Savers)의 호주 19번째 점포다. 세이버스는 호주에서 친숙한 이름이지만, 그 배경에 거대한 미국 기업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세이버스의 모기업은 세이버스 밸류 빌리지(Savers Value Village, SVV)로,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으며 기업 가치는 약 22억 달러(한화 약 3조 원)에 달한다. 미국 사모펀드 아레스 매니지먼트(Ares Management)가 최대 주주다.</p> <p>SVV는 북미 최대의 영리 중고품 소매업체이기도 하다. 미국에 185개, 캐나다에 172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50%에 달하는 매출총이익률은 업계 평균을 크게 웃돈다. 금융정보업체 레피니티브(Refinitiv)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세이버스는 3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시장조사업체 IBISWorld는 "세이버스, 캐시 컨버터스, 빈스(Vinnies) 같은 대형 소매업체들이 소규모 비고용 경쟁사들을 꾸준히 앞서고 있다"며 규모의 경제를 그 이유로 꼽았다.</p> <p>호주에서 세이버스의 존재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빈스(Vinnies)나 살보스(Salvos) 같은 비영리 중고품 매장, 그리고 지역 사회 프로그램 재원 마련을 위해 기부 물품을 판매하는 소규모 자선 가게들과 직접 경쟁하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질롱의 한 자선단체 대표는 세이버스의 등장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노를레인 커뮤니티 하우스(Norlane Community House)를 운영하는 에스더 코닝-오크스(Esther Koning-Oakes) 대표는 자신의 단체가 운영하는 중고품 가게 '트레저스(Treasures)'가 고객과 기부 물품을 빼앗길 수 있다고 걱정한다. "사람들이 물건을 기부할 때는 좋은 목적에 쓰이길 바란다"며 "영리 기업에 기부하면 그 수익이 주주나 경영진에게 돌아갈 뿐, 지역 사회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다.</p> <p>이에 대해 세이버스 측은 자체적인 비영리 파트너십 모델을 내세운다. 세이버스 호주 법인은 지난해 비영리 파트너 단체들에 총 560만 달러를 지급했으며, 이는 매장당 약 31만 달러에 해당한다. 세이버스 호주 대표 마이클 피셔(Michael Fisher)는 "비영리 단체들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매장으로 가져오면, 우리가 그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즉, 매장 내 기부함에 물건을 넣으면 그 수익이 파트너 비영리 단체에 돌아가는 구조다.</p> <p>질롱 개장 행사에는 당뇨병 지원 단체 다이어비티스 빅토리아(Diabetes Victoria)의 글렌 누난(Glen Noonan) 대표도 참석했다. 매장 곳곳에는 이 단체의 로고가 새겨진 초록색 기부함이 놓였다. 누난 대표는 세이버스와의 계약 금액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지난해 받은 수익이 단체 운영에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직접 매장을 운영하는 수고 없이도 중고 기부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개장 당일 줄을 서 있던 한 고객은 "세이버스에서 물건을 사는 건 좋지만, 기부는 구세군이나 질롱 동물복지협회에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이버스는 기부 고객에게 다음 방문 시 20% 할인 쿠폰을 제공하고 있다.</p> <p>세이버스의 사업 모델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기술 투자다. 북미에서는 인공지능 기반 프로그램 '스리프트IQ(ThriftIQ)'를 도입해 상품 가격 책정과 재고 처리 속도를 높이고 있다. UBS의 소매 분석가 마이클 라서(Michael Lasser)는 "이 사업은 자선 단체의 기부 물품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익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세이버스는 ThriftIQ의 호주 도입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p> <p>세이버스는 1950년대 미국에서 시작해 1997년 멜버른 브런즈윅(Brunswick)의 시드니 로드에 호주 첫 매장을 열었다. 현재 뉴사우스웨일스, 빅토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3개 주에서 1,250명을 고용하고 있다. 글로벌 패션 중고 거래 시장은 2027년까지 4,440억 달러(미화 3,17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세이버스 경영진은 최근 분기 실적 발표에서 "젊고 소득 수준이 높은 소비자층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고객군"이라고 강조했다. 2026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약 25개 신규 매장을 열 계획이며, 호주에서도 내년 추가 개점이 예정돼 있다고 마이클 피셔 대표는 밝혔다.</p>